우리의 주식단인 쌀 오늘은 쌀의 재배 역사, 쌀의 생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쌀의 재배 역사
우리 선조가 쌀을 먹기 전에는 잡곡과 맥류를 주식으로 하였습니다. 이류가 농업을 시작한 것이 약 1만년 전이라고 하며, 이 무렵에 세계 각 지역에서 곡식을 재배하여 식량으로 삼시 시작하였습니다.
밀 과 보리 그리고 피, 기장, 조, 수수 등과 같은 잡곡류등의 재배는 각기 중동, 인도,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가 되었습니다.
쌀의 재배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은 인도 동북부 지역인 아삼에서 중국 윈난 지방에까지 걸친 넓고 긴 지대라고 보고 있습니다. 연대는 약 6,000~7,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지대에서 방사형으로 아시아 각 지역에 전파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 한 경로는 양쯔강 하류로 뻗어나가 다시 북으로 올라 황하 유역으로 퍼졌으며 도 다시 동으로 꺽여 우리나라로 통하였습니다.
1977년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에서 발굴된 탄화미, 그리고 그 뒤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토된 탄화미는 그 동안 발견된 고대미 유물로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이렇게 북쪽을 통해서 들어온 쌀 재배는 우리나라 남부로 파급되면서 기후와 지세 그리고 수원의 편리 등 유리한 조건으로 인하여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에서 특히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 백제 신라의 쌀쟁산이 국가규모로 장려 되어었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쌀이 주곡 중에서 제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조세의 주대상이 쌀이었으니 조가 벼의 뜻으로 전용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쌀농사에 관련된 세시풍속도 많이 생겼으며 논을 뜻하는 답자도 차제가 되었습니다. 쌀도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다른 곡식들과 같이 분식을 하였을 것으로 보였으나, 점차 밥을 지어 먹는 입식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분식으로는 시덕(떡의 원형)을 거쳐 떡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나, 삼시의 주식으로는 입식하는 밥으로 변하였습니다. 쌀로 밥을 짓는 틀은 처음으로 시루로 밥을 짓는 광경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귀족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하였던거 같습니다.
통일신라 때에 주식의 기반을 굳힌 쌀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일반화되어 쌀 증산에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수리강화, 재배법 개량, 경지면적 확대, 쌀창고 증설 등 미곡증산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쌀을 화폐로까지 사용할 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미곡생산 제고의 노력은 다각도오 베풀어져 재배면에 있어서는 모내기법의 전국화, 함경도 변경지대의 개답 시도 등 여러 가지 정부노력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일상 식탁의 주식으로서의 쌀의 대종적위치는 물론 여러 가지 가공식품을 개발 할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쌀제품이 어느 대 생겼는지는 현재로서는 추적 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르어서 쌀 이용이 절정에 달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서 없이 보기를 들면 우선 떡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식품으로 엄밀히 말하여 병도 아니며 과도 아니었습니다.
2) 쌀의 생산
우리나라에서 쌀농사가 시작된 것은 신석기시대 후기, 즉 서기전 2000~3000년 경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뒤 삼국시대까지 쌀농사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수도 기술이 전면적으로 파급된 것은 삼국정립 이후 1, 2세기경으로 알려졌습니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쌀농사에 관한 기록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봤을때 삼국시대에 쌀농사가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쌀이 실제 국민들의 주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 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쌀농사는 상당히 보급이 되었지만, 고구려만 하더라도 콩이 주된 식량작물로 재배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창업 이후 치산치수에 역점을 두고 많은 권농정책이 추진된 결과, 쌀생산은 꾸준히 증가함으로써 수백년을 이어오는 동안 쌀은 우리의 주식으로 뿌리에 내리게 된 것입니다.
쌀생산량의 추이를 보면 국권상실 직후인 1910년에는 149만 톤이었는데, 그 뒤 화학비료의 사용과 개간 등에 힘입어 해마다 증가하여 1930~1934녀에는 평균 243만 톤으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쌀증산에도 불구하고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1910년의 101kg에서 1934년에는 52kg으로 약 절반 가량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쌀소비량이 크게 감소한 이유는 쌀수출량이 1910년의 8만 톤에서 1930~1934년에는 연평균 121만톤으로 무려 15배나 증가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에 막대한 쌀이 수출된 것은 국내에 쌀이 남아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강제로 수출된 것입니다.
광복 후 우리나라의 쌀생산량은 북한에서 생산되던 비료공급의 중단, 6.25 전쟁으로 인하여 생산의 부진, 그리고 토지소유제도의 미정착 등으로 1950년 전반기에 연평균 200만 톤에도 미달하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각적인 증산 시책에 힘 입어 연평균 쌀생산량은 300만 톤을 넘게 되었습니다. 1970년 초부터 통일벼의 신품종이 개발, 보금됩에 따라 획기적인 쌀증산이 이루어져 1976년 이후 쌀 생산량은 500만 톤을 상회 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사상 최고수준인 605만 3000톤을 기록하였습니다. 쌀생산량은 1955년 295만 9000톤에서 1988년에는 605만 3000톤으로 33년 동안에 약 2배로 증가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벼의 식부면적은 109만8000톤 정보에서 126만 정보로 불과 15% 증가한 반면, 단수는 같은기간에 79%나 증가하게 됬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중에 쌀생산량으 ㅣ증가는 주로 품종개발과 재배개발기술 등을 통한 단위면적당 수량의 증가에 기인함을 볼 수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품종개발, 기반정비, 기계화 등에 대한 재정투융자 확대에 힘입어 일반계 벼의 단수증가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쌀의 10a당 수량은 1990년 446kg에서 1997년에는 518kg으로 크게 증가 하였고, 1998년에는 기상조건의 불량으로 전년보다 7% 감소한 482kg에 머물렀습니다.
여기까지 쌀의 역사와 쌀의 시대적 생산량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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